학산서원(鶴山書院) 소재지 : 울산광역시 중구 태화동 359-31 학산서원은 향도유림(鄕道儒林)과 성손의 공의(公議)로 울산박씨 대종회에서 창건(創建)한 것이다. 경내에는 사당인 존덕사(尊德祠), 전사청(典祠廳), 내삼문인 경앙문(景仰門), 강당인 충의당(忠義堂), 동재인 존양재(存養齋)와 대문인 숭절문(崇節門), 종택인 학강헌(鶴岡軒) 그리고 신도비(神道碑) 및 기타 건물이 배치되어 있다. 존덕사에는 울산박씨 시관조(始貫祖)이신 흥려백 장무공(興麗伯 莊武公) 고려개국 통합삼한 벽상공신 휘(諱) 윤웅(允雄)을 주벽(主壁)으로 봉안하고 16세손 사은공 박추 (沙隱公 朴諏)와 사은공 종제 류은공 박유(柳隱公 朴愈)와 사은공 6세손 학수당공 박홍춘(鶴睡堂公 朴弘春) 등 삼현(三賢)을 배향(配享)하고 있다. 매년 음력 3월 중정일(中丁日)에 향도유림(鄕道儒林)과 후손이 향례(享禮)를 봉행(奉行)하여 선현(先賢)을 추모하고 있다. 사은, 류은 양(兩) 선생(先生)은 여선(麗鮮) 교체시 불사이군의 충절을 지켜 모든 벼슬을 버리고 향리(鄕里)에 은둔하여 종신수절 하다가 한세상을 마치니 당시 사람들은 가련하게 여기지 않은 이 없었고, 학수당공 휘(諱) 홍춘(弘春)은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창의거병 하여 백천간두에 선 국권을 회복하는데 사생취의로 대공(大功)을 세우니 조정에서 선무원종 일등공신에 녹훈하고 많은 사패지를 하사 하였다. 이상 삼현(三賢)의 충의(忠義)를 추모(追慕) 하고 후손들의 인성교육(人性敎育)의 산교육을 강의(講議)하는 도장(道場)이기도 하다. 학산서원의 연혁 학산서원의 전신(前身)은 용강사(龍岡祠)이다. 용강사는 경남 양산시 용당동 191번지에 1851년(철종2, 辛亥) 봄에 사림과 후손들의 공의(公議)로 창건되었다. 사당은 용강사(龍岡祠) 강당은 모선재(慕先齋)로 각각 편액하고 그해 9월에 완공하고 울산박씨 시조인 흥려백 장무공 박윤웅을 주벽으로 봉안하고 려말(麗末) 충의(忠毅) 충청감사 사은공 박추 선생을 배향하고 매년 9월 중정에 향중 사림들과 후손들이 향사를 받들었다. 1871년(고종8, 辛未)에 대원군의 서원 훼철령에 의해 훼철되어 향화가 끊어졌다가 1905년(광무9, 乙巳)에 후손이 힘을모아 구지(舊址)에 설단(說壇)하고, 강당 4칸과 포사(부엌)4칸, 삼신문과 대문 3칸을 세웠다. 이때 강당 모선재의 기문은 국리 박희영이 찬(撰)하고 휴허비문 개갈(改碣)은 숭정대부 행 시종원경 완산 이근수가 찬(撰)하였다. 모선재기는 가선대부 행 장예원 소경 진주 강우형이 찬(撰)하였다. 1940년 모선재 중수를 하고 중수기문은 학성 이우락이 찬하고 1973년 모선재를 재중수하고 그 記文은 학성 이우락이 찬하고 대흥파(大興派) 유은공(柳隱公) 후손 승기(承基), 승열(承烈), 정팔(禎八), 정대(禎大) 등이 사은공(沙隱公)의 종제(從弟) 휘 유(諱 愈)를 배향(配享)하여줄것을 청원하매 즉시 공의(公議)를 부쳐 배향하기로 결정하니 류은공 후손들은 설단비용과 아울러 위토답 400여평을 헌납하였다. 1984년 9월 향례후 종회시 유사 정양(政洋)씨 제의(提議)하기를 우리 용강단소가 아직까지 복원되지 못하고 노단에서 제향하니 후손된 자 죄책감이 생긴다. 하루속히 옛 용강사를 복원하자고 역설하니 듣는 이 모두 찬성하여 곧 이행하자고 말하였다. 그러나 공사비의 문제가 대두되자 제내 문중 주엽(注燁)이 말하기를 대동보 수보기기도 되었으니 아울러 수보하여 분질할 때 책대(인쇄비)외 봉성금의 내용으로 가상하여 약 1,000여질이 반질되면 후손 천명이 동참하는 뜻이 있음으로 그렇게 하자하니 모두 찬동하였다. 1985년부터 수보업무 시작하여 익년 7월에 인쇄를 마치고 반질하였다. 1985년 9월 향례대 복원사업 추진위원회를 결성하고 규약(規約)을 재정하고 임원을 선발하여 용강사 복원사업을 시작하였다. 1988년 8월 13일 태화동 진미식당에서 각파 대의원 50명이 참석한 가운데 회의 제안건을 심의 결정하니 다음과 같다. 1. 말응문중 학수당공 후손 원식(源植)씨 께서 제의(提議)하기를 "용강사 복원도 좋은 일이나 여생이 얼마남지 않은 내가 무슨 욕심이 있겠나하면서 우리 문중 땅(태화동 산36-6) 일천여평을 대종회에 헌성하겠으니 옛 장무공 선조의 소거지이며 주 활약하시던 곳이고 유림출입 후손의 참여하는 대도 용이하니 이곳에 거각을 지어 앞으로 서원으로 만들면 좋겠다."하였다. 2. 가부표결을 부치니 찬성45, 반대5명으로 합리적으로 가결하였다. 1986년 3월 31일자 1차공사에 사당, 강당, 삼신문 대문을 정하고 2차공사는 종택을 짓고 3차는 동,서재와 전사청과 관리실을 짓고 나머지는 4차로 하기로 하고 경주시 황호동 김상헌(金尙憲) 도목장(都木匠)과 1차공사비 8천2백만원으로 계약 체결하였다. 1986년 토목공사비 1천8백2십만원과 1990년 3월에 2차공사 종택건축공사 역시 김상헌씨와 6천2십만원 에 계약체결하니 도합 2억2천98만원이었다. 잔여공사는 자금고갈로 중단되었다. 2003년 단답(壇畓) 입부를 매각하여 전사청과 존양재(存養齋)를 건립하고 신도비를 수립(竪立)하였고 2004년 12월부터 2005년 8월까지 존덕사(存德祠) 경내의 배위석(拜位席)과 사당 주위(周圍)에 모두 석판(石板)을 깔았고 계단(階段) 양편에 손잡이 공사 스텐레이스 재료로 시공하여 승강(昇降)에 편의를 도모하였다. 한편 사당 강당 내삼문 외삼문 종택등 도장(塗裝) 공사를 하여 빛나게 하였다. 2005년 5월 전북 남원시 산내면의 금호 김을생(金湖 金乙生,인간문화재)의 금호공방에서 위패(位牌) 4위(位), 교의(交椅) 4위분, 제상(祭床) 특1개(個) 보통 3개(個), 향탁(香卓) 4개(個) 두제기(豆祭器) 16개(個), 축판(祝板) 1개(個)를 주문계약하여 동년 8월 20일 납품되었다. 2005년(乙酉) 9월 중정(中丁)에 향도유림 파록(爬錄)으로 신도비 수립(竪立)과 위패(位牌) 4位 제위봉안고유(題位奉安告由) 행사를 봉행하였음을 명실공히 학산서원 위상이 저현(著現)되었다. 당시 서원 복설을 축하하는 시(詩)가 수 백 수가 답지해 이를 한권의 시집으로 묶어 전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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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산서원 충의당 (鶴山書院 忠義堂) 소재지 : 울산광역시 중구 태화동 459-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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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덕사 묘우(尊德祠 廟宇) 소재지 : 울산광역시 중구 태화동 459-31 (학산서원 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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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통일대전(高麗統一大殿) 소재지 : 경기도 파주시 탄현면 성동리 산 72 번지 면 적 : 약 41,200㎡(12,463평) 경기도 파주시 통일동산내에 소재한 고려통일대전 본전에 신위(神位)가 봉안된 385위이다. 고려 태조 왕건(王建) 등 역대 34명의 제왕(帝王)과 61개 성씨(姓氏) 136개 문중(門中)과 고려역사선양회가 사계의 자문을 거쳐 선정, 봉안한 문무제현(文武諸賢) 351위로 구성되어 있다. 여기에 울산박씨 시조 장무공(莊武公) 박윤웅(朴允雄) 개국공신흥려백(開國功臣興麗伯)과 16世 사은공(沙隱公) 박추(朴諏), 16世 유은공(柳隱公) 박유(朴愈) 등 3위(位)가 배향(配享)되어있다. 蔚山朴氏 莊武公 高麗大殿 配享位 흥려백 장무공 박윤웅 선생(興麗伯莊武公 朴允雄先生)은 울산박씨(蔚山朴氏)의 시조(始祖) 이시다 시호(諡號)는 장무(莊武)이며 봉호(封號)는 흥려백(興麗伯)이다 흥려(興麗)는 울산(蔚山)의 옛 이름이다. 高麗大殿(朴允雄先生)奉安文 오호(嗚呼)! 선생(先生)은 신라 시조왕 박혁거세(始祖王朴赫居世)의후손 으로 신라효공왕5년(901년)신유(辛酉)에 지금 울산 학성(하곡현신두산)에 정착하여 신학성장군(神鶴城將軍)이되어 이지역을 통치(統治)하는 호족장(豪族長)으로서 세력을 확장하고 소국왕자격(小國王者之格)으로 번창하였다 918년고려태조 개국시에 보좌하여 개국 공신에 오르고 후삼국 통일에 혁혁한 공을세워 이 공을 가상히 여긴 태조는 선생(先生)이 통치(統治)하던 동진현(東津縣) 하곡현(河曲縣) 우풍현(虞風縣) 동안군(洞安郡) 임관군(臨關郡)等 5개군현(個郡縣)을 합병(合倂)하여 흥려부(興麗府)로 승격(昇格)하여 선생(先生)을 흥려백(興麗伯)에 봉작(封爵)하여 대장군(大將軍)에 배명(拜命)하고 통합삼한 익찬공신(統合三韓翊贊功臣)에 녹훈(錄勳)되시고 통치(統治)하던 전역(全域)을 사채지(賜采地)로 하사(下賜)되었다 유포의 곽암(藿巖)12구도 하사(下賜) 받으시도다 곽암(藿巖)은 미역이 생장(生長)하는 바위라는 뜻으로 이 미역바위를 지금도 양반(兩班)바위, 박윤웅 바위, 등으로 불리고 있으며 아직도 그 당시 사채지(賜采地) 일부(一部)인 곽암(藿巖) 1구(區)가 울산시 북구 강동 구유리(蔚山市北區江東舊柳里)해중(海中)에 보존(保存)되어 곽암(藿巖)에 윤웅(允雄) 이라는 두 글자가 새겨져 있으므로 이것은 선생의 위대한 공훈(功勳)과 영원(永遠)토록 썩지 않을 뜻을 기려서 어사 박문수(御使朴文秀)가 새긴 것이라고 전(傳)해지고 있도다 이 곽암(藿巖)은2001년12월20일자 로 울산광역시 지방문화재(地方文化財)기념물(記念物)제38호로 지정(指定)되어 울산박씨종중(蔚山朴氏宗中)에서 관리(管理)하고 있으며 여기서 생산(生産)되는 미역 일부(一部)를 매년(每年)징세(徵稅)하여 음력(陰曆)3월중정일(中丁日)에 윤웅선생(允雄先生)의 향제시 제수(享祭時祭需)로 제공(提供)하고 있으니 인륜(人倫)의 덕풍(德風)이 후손(後孫)에게도 순화(醇化)함을 이루시고 또한 그 공훈(功勳)은 만세(萬世)에 불후(不朽)하리로다. 이제 성조(聖祖)를 따라 승국(勝國)의 선정(先正)을 열실(列室)에 배사(配祀) 하노니 고려제국(高麗帝國)의 오백년 역사(五百年歷史)가 오직 이에 현영(顯榮) 하도다. 드디어 고려 선양회 유사(高麗宣揚會有司)는 감(敢)히 존령(尊靈)을 고려대전(高麗大殿)서배향(西配享)목열(木列)32번위(番位)에 봉안(奉安)하고 정결(淨潔)한 예제(禮齊)를 갖추어 선생의 영전(靈前)에 천신(薦新)하나이다. 바라옵건데 불매(不昧)하신 밝고 밝은 영령 |
충의사 묘우(忠義祠 廟宇) 충의사는 의사(義士) 제위의 위패가 모셔져 있는 사당이다. 전열 중앙에 "울산임란의사신위(蔚山壬亂義士神位)"라는 위패를 중심으로 1열에 선무원종일등((宣武原從一等)부터 2등, 3등 의사 순으로 5열까지 239위가 봉안되어 있다. 여기에 울산박씨 선조 12위가 배향(配享)되었다. 소재지 : 울산광역시 중구 학성동 45-1 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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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랑공 박근 배위 현풍곽씨 정려각(正郞公 朴根 配位 玄風郭氏 旌閭閣) 소재지 : 충청남도 예산군 광시면 구룡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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숭덕전(崇德殿) 소재지 : 경상북도 경주시 탑동 77번지 오능원 내 숭덕전은 신라의 시조왕인 박혁거세(朴赫居世) 거서간(居西干 : 왕의 휘호)의 위패(位牌)를 모셔놓고 봉사(奉祀)하는 제전(祭殿)이다. 서기 6년 (신라 2대 남해왕 3년)에 시조묘(始祖廟)를 창건하고 제사를 올린 후 신라의 모든 왕들이 이 시조묘에 제사를 올렸는데 서기 487년(소지왕 9년)에 시조왕의 출생지인 나정(蘿井)에 나을신궁(奈乙神宮)을 세웠다. 이 시조묘와 신궁이 고려 때까지 계속 보전되어 왔었는데 서기 1429년(조선 세종11년)에 삼국 시조의 묘전(廟殿)을 같이 지으면서 오능 옆에다가 삼각지의(三恪之義)의 예(禮)에 따라 숭덕전을 처음 짓고 축책(祝冊)을 내려서 제사를 받들게 하였다. 그 뒤 임진왜란에 숭덕전이 전부 타 버리자 숭덕전 참봉으로 있던 박언수(朴彦秀)가 위패를 선도산(仙桃山)에 있는 성모사(聖母祠)에 잠시동안 모셨다가 1601년(선조 34년)에 경상도(慶尙道) 관찰사(觀察使)로 있던 이시발(李時發)이 다시 짓고 위패를 모셔왔다. 그 뒤 1618년(광해군 10년)에 경상도 관찰사인 박경신(朴慶新)이 이 전우(殿宇)를 고쳐지었으며 1723년(경종 3년)에는 숭덕전이라 사액(賜額 : 임금이 이름을 지어 내림)하고 1761년(영조 37년)에는 그 동안 위패에 「시조왕」이란 칭호(稱號)가 없었는데 그 때부터 「시조왕」이란 칭호가 들어간 위패를 다시 만들어 봉안(奉安)하였다. 지금의 이 전각(殿閣)은 1928년에 경주지군사(慶州知郡事)와 숭덕전 참봉(參奉) 찬배(瓚培)가 합심하여 다시 중건(重建)한 것이다. 사진은 고가(高架)에 올라 촬영한 것으로 매년 춘분(春分)에 향사(享祀 : 殿祭)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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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강사(龍岡祠) 소재지 : 경상남도 양산시 웅상읍 용당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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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허비각(遺墟碑閣) 소재지 : 경상남도 양산시 웅상읍 용당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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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양재(동재) 存養齎(東齎) 소재지 : 학산서원 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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