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대주요인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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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란 창의의사

임란 때 창의하여 공을 세웠다. "창표당안"에 통정대부로 만도(晩到) 15원(員)의 일원으로 기록되어 있다. 울산 충의사에 배향되었다.

? ∼ 1597

임란 창의의사 (하양파)

훈련원첨정(訓鍊院僉正)

경상북도 경산시 하양읍 출생.

호는 송암(松巖). 동래 수성장(守城將)으로 순절한 안세(安世)의 큰아들이고 정략장군훈련원첨정니다. 일찍 무예를 익혔으며 특이 궁시사후(弓矢射候)에 적중하지 않음이 없었으며 지용이 뛰어나 사람들의 우러러 본 바 되었다.

1592년(선조 25년)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아들 붕과 함께 분연히 탄식하기를 대장부 세상에 태어나서 나라의 변란을 당하여 차라리 전쟁터에서 시체를 말가죽에 싸는 한이 있다 해도 어찌 집에 앉아 몸을 보존하리요 하고 의병을 일으켰다.  하양의  의병장 신해(申海), 김거(金據), 황경림(黃慶霖), 허대윤(許大胤), 허응길(許應吉) 등과 북진하는 왜병을 저지하며 하양성을 방어하였고 이에 용기를 얻어 하양성(河陽城)을 견수(堅守)하였으니 이 고을은 어느 고을보다 피해가 적었다.

1594년 (선조 27) 4월 3일 별시 무과에 급제하였고 전공을 인정받아 정략장군 훈련원첨정에 제수되었다.

1596년 9월에 화해의 교섭이 결렬(決裂)되자 왜적은 15만 대군으로 재침하여 정유재란이 일어났다.

1597년 정유재란이 발발한 후 조명 연합군이 왜성에 쌓여 주둔하던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의 부대를 공격한 도산성전투 당시 12월 21일 양호(楊鎬)와 제독 마귀(馬貴)등은 대군을 이끌고 조령에서 안동을 거쳐 경주에 이르러 도산성을 공성키로 하였다. 이때 경리양호(經理楊鎬)는 도원수 권율(權慄)에게 경상좌수사 이운룡(李雲龍)으로 하야금 서생포의 왜적을 견제하도록 하였고 이 작전에 참여한  공(公)은 용전분투하였으나 중과난적으로 장렬하게 순절하였다.

묘소는 경상북도 경산시 하양읍 사기동산(沙器洞山)에 있다.

후손들이 공(公)을 기리고자 경산북도 경산시 진량읍 다문리에 재실인 송암재를 지었다.

경산 하양 지역에서는 공(公)과 박붕을 하양 8의사에 포함하여 현창하는데.

1974년 임란창의하양제공사적비(壬亂倡義河陽諸公事蹟碑)를 옛하양읍사무소 앞뜰에 건립하였다.

2000년 임진왜란 창의 의사로 충의사[울산광역시 중구 서원11길 25]에 위패가 봉안되었다.

1539 ∼ 1608

임란창의의사 (제내파)

훈련원봉사(訓鍊院奉事) 증가선대부동지중추부사(贈嘉善大夫同知中樞府事)

자는 국서(國瑞), 호는 병계(屛溪).

울산 북구 신천동(북면 제내동) 출생하였다.

고려 말 지한주지사와 충청감사를 지낸 사은공 박추의 6세손이며 아버지는 봉열대부 선락장군 여림(汝霖)이며 1남 2녀중 외아들이다. 公은 충의세가의 가훈을 이어받으니 지행이 청고(淸高)하고 지식이 초탁(超卓)하여 울연(蔚然)히 유림의 추앙을 받았다. 公이 53세 때인 선조 25년

1592년 4월 13일 왜적대군이 부산으로 상륙하여 부산진성과 동래성을 차례로 함몰시키고 4월 19일에는 울산읍성과 병영성을 무혈점령한 적도들의 천인공로할 만행에 분연히 창의하여 동지들과 기박산성으로 집결하였다.  4월 21일 이경연,심환, 고처겸, 박진남, 이한남, 김응방 등과 함께 모여 거병에 대해 논의하였고

1592년 4월 23일 기박산성에서 울산 의사들과 경주 의사들이 편대, 결진할 때  박봉수를 대장으로 삼고 公은 좌익장(左翼將)으로 편대하고 5월 5일에 경주의병 500여명이 찾아와 합진하고  5월 7일 밤을 틈타 경상좌병영성에 둔거하는 적을 기습하여 경상좌병영성 탈환에 큰 공을 세운후 여러 의병장과 함께 운문산으로 진을 옮겨 군비를 갖추었다. 6월 7일 문천회맹으로 좌도 여러 고을 의병들이 모여 결사항쟁 할 것을 회맹하고 영천 의병장 권응수의 영천성 수복전에 분투하여 큰 공을 세웠다.

1593년 2월에 개운포와 태화강구 전투, 관문성 전투에 분전하였고 대수장군 이안국公과 함께 위해처(危害處)마다 찾아가 큰 공을 세웠다.

1594년에는 무과에 단독 별시에 급제하였고,  

1597년 정유재란 때 학성전투 도산왜성전투에서 도원수 권율 막하에서 용전분투하여 많은 공을 세웠다.

   벼슬은 훈련원봉사에 이르렀고 뒤에 가선대부 동지충추부사로 증직되었다.

묘소는 경산북도 경주시 외동읍 석계리 중방산 酉坐에서 2014년 12월 21일 면례(緬禮)하여 석계리 산115번지 丑坐에 부인과 함께 합폄(合窆)하였다.

2000년 충의사(울산광역시 중구 학성동 서원11길 25)에 임진왜란 창의 의사로서 위패가 봉안되었다.

1994년 5월에  "병계실기" 86페이지 초판이 간행되었고,

2009년 7월에  "병계실기" 429페이지 증보판이 간행되었다.

 

 1557  ∼ ?

선무원종3등공신 (경주파)

참봉수문장(參奉守門裝)

초 諱 사종(詞宗).

울산 북구 상안동 출생

참봉 량(樑)의 큰아들이며 부인은 박무지(朴武智)의 딸 밀양박씨이다. 

1592년 왜적 대군이 부산 다대포로 침범하여 병사 이각과 군수 이언함 등은 성을 버리고 도주하여 영성은 공허하여 왜적에게 무혈점령 당했다.이때 이 고을 의사 서몽호(徐夢虎), 서인충(徐仁忠), 박홍춘(朴弘春), 전응춘(全應春)등은 公의 친인척간으로서 뜻을 같이하고 산곡간에 피신한 장정들을 모으니 달포가 못되어 3,000여명의 의병을 모았디. 公의 매부인 전응춘(全應春)을 따라 사남(훈련원주부)과 함께 참전하여 준동하는 적을 무찔렀다.

1592년 9월 순찰사 한효순과 좌병사 박진이 울산의진의 첩보를 듣고 도임(到臨)하여 인망이 높은 김태허를 가군수로 특사하고 전현감 박홍춘을 서면장으로 삼아 동래 기장의 적을 막게하고 전봉사 전응춘을 남면장으로 삼아 양산 기장의 적을 막게하고 서인충을 주사장으로 삼아 공사선(公私船)을 수리하여 해상을 막게하고 사군수 김태허는 위급한 첩보에 따라 군사 3백으로 지원하게 하여 그 후 7~8차례의 전투에 수많은 전과를 올렸다. 왜적은 대대적인 병력을 갖추어 四道로 나누어 병진 할 때 군병은 중과부적하여 경주로 이진하여 주사장 서인충은 이견대해 중에서 적 참살이 부지기수(不知其數)라 하였고 대왕암 봉길 장기 소봉대로 전전하며 200여급을 참살하고 군기를 노획하는 전과를 올렸다. 울산의군들은 경주에서 멀리 안동까지 나아가 적을 무찌르고

 1593년 8월에 좌병사 의군과 함께 울산에 준동하는 적을  격퇴시켜 고을을 수복하는 큰 공을 세웠다. 전황은 강화교섭으로 소강상태에 접어들어 울산 경주 의병들이 주동이 되어 끝까지 왜적을 무찌르자는 10월 29일의 구강회맹에 참가하여 결사항쟁할 것을 회맹하고 동고록을 작성하였다. 그후로 산성에서 최후로 적을 물리칠 때 까지 7년 전쟁에 용전분투하였으며 훈련원정(訓鍊院正)에 제수되었고, 통훈대부(通訓大夫) 어모장군(禦侮將軍)에 이르렀다.

1605년(선조 38) 4월 선무원종공신 3등에 녹훈되었다. 

묘는 울산광역시 북구 시례동의 문중 선영에 있다.

2000년 울산광역시 중구 학성동에 있는 충의사에 위패가 봉안되었다.

울산 충의사에 배향되었다.

 1561 ∼ ?

울산도호부 출신.

선무원종3등공신 (갑산공파)

어모장군(禦侮將軍) 훈련원첨정(訓鍊院僉正)

자는 몽서(夢瑞) 부친은 충순위 어모장군 원신(元信)의 둘째아들이다.

모친은 훈련원정 박거인의 딸 밀양박씨이다.

부인은 밀양박씨이며 슬하에 1남 2녀를 두었다.

1592년 4월 14일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의병을  일으켰고 김윤복, 김언복 형제와 이한남, 고처겸, 박봉수, 김득례와 함께 창의 하여 의병을 모집하고 대오(隊伍)를 정돈하여 적의 요해지(要害地)에 매복하고 또는 진로를 차단하여 적을 격멸하는 등 많은 전공을 세웠다.

1592년 6월 9일 문천회맹에 참여하여 서사토적의 결의를 다졌으며

1592년 10월에 왜적이 바다와 육지 양방향에서 침입하여 오자 군수 김태허와 전응춘, 박홍춘, 서인충 등의 의병들과 더불어    전투에 참여하여 많은 전공을 세웠으며,

1592년에 치러진 무과에 단독 별시(別試)에 급제하였다.

1593년 10월 구강회맹(鷗江會盟)에도 참여하여 동고록(同苦錄)에 서명하고 태화강 사수를 결의하였다. 울산 경주 영천 대구 등 여러 지역에서 수많은 정공을 세웠으며,

1594년 4월 3일 무과에 급제하여 벼슬이 어모장군(禦侮將軍) 훈련원첨정(訓鍊院僉正)에 제수되었다.

1599년(선조 32년)10월 명나라 장수 마귀(麻貴)가 울산 서생포 창표당(蒼表堂)을 지어 공을 세운 의사들의 위패를 열향(列香)하였으며, 기문인 "창표당안"에는 생절(生節) 28명 중 한 사람으로 기록되어 있다.

묘소는 울산광역시 울주군 온양읍 광천골에 있다.

1605년(선조 38년) 4월에 선무원종공신 3등에 녹훈되었다.

2000년 울산광역시 중구 학성동에 있는 충의사에 위패가 봉안되었고,

2017년 복원된 울주군 서생면 창표사(蒼表祠)에도 위패가 봉안되었다.

 1564  ∼ ?

선무원종3등공신(宣武原從三等功臣) (말응파)

어모장군(禦侮將軍) 훈련원주부(訓鍊院主簿) 

울주군 응촌면 대복리 출생

무안현감 홍권(弘權)의 큰아들로 어릴 때부터 영리하고 기개가 있어 경서에 달통하였고 궁사승마에도 능해 문무가 겸전하였다. 

1592년(선조 25년) 4월  19일에 울산읍성과 울산읍성과 병영성이 무혈 점령 당하자 숙부 홍춘(弘春), 홍남(弘楠)과 더불어 대소가의 숙질과 마을의 장성을 모아 창의하여 운문산에 모인 의병들과 함께 부대를 편성하고   서생과 양산쪽에서 들어오는 적을 막았다. 전천(箭川) 전투에서 경주 의병장 김호와 더불어 경주로 들어가는 적을 섬멸하고 신광윤 부자와 단조봉의 사자평전투에서 적을 물리쳤다.

1594년에는 별시(別試) 무과에 급제하였다.

이후 숙부 홍춘公을 따라 기장읍성 수복전에 참전하여 큰 전공을 세우고

1597년(선조 30년)정유재란이 일어나 조명 연합군이 도산성에 농성하는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의 의 병사들을 공략할 때 도원수 권율의 휘하에서 용전분투하여 큰 공을 세웠으며 수문장에 제수되었다.

1605년(선조 38년) 4월  선무원종공신 3등에 녹훈되었다.

2003년 울산광역시 중구 학성동에 있는 충의사에 위패가 봉안되었다.

1564 ∼ ?

임란 창의의사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의병을 일으켜 싸웠다.

1597년 (선조 30) 11월 2일 태화강전투에 참전한 기록이 있다. 가토오 기요마사(加藤淸正)의 군이 서생포와 울산읍으로 물러나 있으면서 온갖 만행을 저지르자 경상좌병사 성윤문이 여러 장수들과 결전의 의지를 다지고 성황당 일원에서 왜병들을 소탕하였다. 특히 태화강과 그 남쪽의 개운포로부터 진격해 오는 적들을 맞아 김막심, 오수량, 지수, 김금복 등과 함께 싸우다 총상을 입었다. 이때의 활약이 장계에 보고되었다.

1609년 울산부호적대장에 당시 울산부 남면 대대여리(大代如里)에 거주하였고 관직이 주부(主簿)로 되어 있다.

2006년 충의사[울산광역시 중구 서원11길 25]에 위패가 봉안되었다.

 

1566 ∼ 1641

임란창의의사 (초산공파)

자는 선익(善翼)

어모장군(禦侮`將軍) 오위도총부경력(五衛都摠府經歷) 

옥포수군만호(玉浦水軍萬戶) 증 형조참의 원우(元祐)의 둘째아들.  무과에 급제하여 어모장군 월성만호 병마무후 경력등을 역임하였다.

1592년 4월에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전응충의 5촌 조카 전영과 함께 창의하여 기박산성의 의병진에 합류하였고

          전영과 함께 동래성 방어전에 참여했으며 함께 전투에 참여한 전영은 동래성전투에서 순절하고 본인은 구사일생으로

          목숨을 건진 뒤 언양에 사는 조카사위 [형 박경창의 사위]신전과 그 아버지 신광운의 의병 부대에 합세하였다.  

1592년 4월 23일에 편대하여 병영성으로 시작한 전투에서 울산과 경주를 왕래하며 여러차례 큰 공을 세웠다.

1593년 태화강구 전투에서 화공으로 적선을 격파하고 관문성 전투에서 경주 의군을 도와 수천의 적을 물리쳤다.

1597년 정유재란 때 방어사 곽재우와 화황산성 수성전에서 적을 물리치고 끝까지 결사항쟁 하자는 서명을 하고

1597년 12월에 도산성 공성전에서 연합군의 선봉에서 용전분투하였다. 전쟁이 끝난 후 조정에 알려져 보성군수와 경상좌도,     월성만호, 병마우후, 도총부경력 등을 지냈다.

1599년 10월 명나라 장수 마귀가 울산 서생표에서 회동을 열고 창표당을 지어 공을 세운 사절들의 위패를 열향(列享)하였다.

  그 기문인  "창표당안"에 만도(晩到) 15원(員)의 일원으로 기록되어 있다.

 뒷날 아들 이명(병사공)의 영귀(榮貴)로 숭정대부 판돈령부사겸 판의금부사 오위도총부도총관의로 증직 되었다.

 묘소는 울산광역시 울주군 온양읍 운화리에 있다.

2000년 임진왜란 창의 의사로 충의사[울산광역시 중구 서원 11길 25]와

2017년 복원된 창표사[울주군 서생면 서생리631]에 위패가 봉안되었다.

 1569 ∼1646

임란창의의사 (말응파)

훈련원부정(訓鍊院副正) 자헌대부지중추부사(資憲大夫知中樞府事)

자는 비윤(丕胤), 호는 반오헌(伴鰲軒), 

1569년(선조2년)10월 10일 경남 양산 용당동(당시 울산군) 출생

무안현감 홍권(弘權)의 둘째아들이다. 선무원종공신 1등에 녹훈된 기장현감 홍춘(弘春)의 양자로 들어가 대를 이었다. 아들은 박취문이다 어릴 때부터 영특하고 글 배우고 읽기를 좋아하여  경전을  통달하였고 궁사승마(弓射乘馬)에 능하고 문무가 겸전하였으며 덕망이 있었다.

1592년(선조25년) 임진왜란을 당하여 夫公를 따라 대소가 형제 숙질과 더불어 창의하여 운문산에 부진하고 夫公을 도와 언양읍성공성전에서 용정분투하여 큰 공을 세우고 부산 기장쪽과 양산등지에서 들어오는 적을 막았다.

9월에 순찰사가 병사와 더불어 울산을 찾아와 의병을 통합편대할 때 夫公인 홍춘은 서면장으로 추대되었고

1592년 10월에 기장의 의병장 김일덕(金一德), 김일개(金一介) 형제와 더불어 기장읍성을 기습하여 적을 물리치고 큰 전과를 세웠다.  7년 동안 전쟁에서 여러번 기이한 전공을 세웠다

1594년(선조27년) 4월에 전쟁중에 무과별시에 급제하여 관군으로 편대된후 선전관을 거쳐 훈련원판관, 훈련원부정, 원정(정3품 당하관),을 지냈다. 

1605년(선조33년) 10월 15일에 병사인 김응서와 판관인 조성립과 함께 함경도 회령땅에 변방장으로 부임하여 군의 기강을 바로 잡고 성체를 보강하고 변방수비에 만전을 기했으며

함경도로 파견되어 약 1년간 군관으로 근무하면서 적은  일기가 있으며 임기가 만료되어,

1607년 정월 초2일에 귀가하였다

1621년(광해13년)에 가선동지(嘉善同知)에 오르고

1638년(인조16년)에 정2품 자헌대부(資憲大夫)에 승진되었다  

1644년 함경도 회령과 경성에서 부방(赴防)하며 적은 아들 박취문의 일기를 묶은 "부북일기(赴北日記)"가 전해지고 있다. 

  묘소는 울주군 웅촌면 대복리 오복동에 있다.

2000년 충의사 [울산광역시 중구 서원11길 25]에 임진왜란 창의 의사로 위패가 봉안되었다.

2006년 1월 26일 부북일기를 울산광역시 유형문화재 제14호로 지정되었고.

2010년 10월 울산박물관에 기증되었다.

 ? ∼ ?

선무원종3등공신 (유곡파)

절충장군(折衝將軍)

울산 중구 유곡동 출생

안일호장 세량(世良)의 아들로 어릴 때부터 명석하고 기개가 있어 글을 좋아하였고 궁사(弓射)와 승마에도 능했다.

1592년 4월 임진왜란때 울산읍성과 병영성이 무혈점령 당하자 종형 응춘(應春)과 대소가의 숙질 및 마을의 장성을 모아 동대산 기박산성의 의병진으로 부진하였고, 함월산성에 울산 지역 의병들이 집결할때 참여하여 의병 부대를 편성하였고 병영성을 기습 공격으로 큰 전과를 올리고 기장과 서생쪽에서 수로로 들어오는 적을 공암, 나아에서 물리치고 석읍으로 진을 옮겨 경주의병장 황의안,이눌, 김응택, 김응하와 여러 차례 공을 세우고 문천회맹에 이어  

1593년 태화강구로 들어오는 적을 물리치고 멀리 장기 소봉대와 안동까지 나아가 공을 세웠다.

1597년 정유재란 때 조명연합군이 도산성을 칠 때 도원수 권율의 막하에서 용전분투 하여 큰 공을 세웠다.

     임진왜란 때의 공으로 향리로서 역을 면제받았으며,

1605년(선조38년) 4월 선무원종공신 3등에 녹훈되었다. 

2003년 울산 중구 학성동에 있는 충의사에 위패가 봉안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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